22/09/18 [이해창 안수집사-1부]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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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창 안수집사의 고백"


은 어둠이 내려앉아 사방이 까만 밤 자락으로 뒤덮인 시간,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깨우곤 했다.

어린 시절 늦은 밤이면 동생들과 함께 자고 있는 방에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시간이었다. 어머니 기도 소리에 간혹 잠이 깨곤 했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자는 척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사랑과 눈물을 머금은 기도가 간절하고 애절하여

그 사랑의 울림소리에 눈을 뜨질 못했다.

때때로 어머니의 기도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지곤 했고

어머니의 애잔한 기도에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힐 때도 있었다.

어느 날엔 언제 돌아올지 모를 먼 길을 떠나시기 전

우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 계신 것같이 느껴진 적도 있다.

그 눈물의 기도가 너무도 절박하고 간절하다 보니

어린 내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연민과 슬픔과 떨림의 감정이 솟구쳐 나를 억누르기도 하였다.

마치 기도가 끝나면 우리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실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 나머지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 품에 부둥켜 안겨 울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머니는 당신 나이 30대에

동네분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시게 되면서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하고 계신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8남매를 키우시기 위해 오랜 세월 몸소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수고와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에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그 당시 세상의 풍파 속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매일 밤마다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고 부르짖으며

자녀들의 안위와 축복을 빌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는 매일 삼시 밥을 지을 때마다

성미통에 쌀을 덜어 놓으시고 형편이 어려워도 십일조는 꼬박꼬박 하시며

내가 교회 갈 때면 손에 헌금 돈을 쥐여 주시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훈육하셨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종의 삶을 사시면서 필요할 땐 과감한 믿음의 결단을 하셨다.


아버지가 집안의 장손이셔서 우리 집에서 고조부까지 제사를 모셨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집안의 어르신들이 우리 집에 모여 제사를 드리던 때였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이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셨던 모양이다.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막상 내 집에서 제사를 모셔야 하니 말이다.

어머니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제사를 끊고 싶으셨겠지만

오래전부터 내려온 집안 전례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만은 없으셨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지혜를 내어 과감한 결의를 행동으로 옮기신다.

그때가 아마도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때로 기억하는데

제사가 있는 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제사상을 차려 놓으시고

집안 어르신들이 제사를 올리기 전

어머니께서는 가족들을 다른 방으로 불러 모으시고

예배를 먼저 드리는 것이다.

한쪽에선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여 계시는데

다른 한쪽에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나한테는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들이 이 같은 광경을 보시곤

얼마나 황당하고 괘씸해하셨을까!

이후에 치러진 제사 기일에도 몇 차례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엔 집안의 큰 어른이셨던 작은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서의 제사를 중단하셨다.

그동안 오랜 세월 우리 집에서 행해진 제사의 굴레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면서 많은 핍박을 정면으로 맞서 이겨낸

어머니의 값진 영적 승리가 결실을 맺게 되었다.

명절 때만 되면 제사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여러 교우들을 보면서

오래전 어머니의 용기와 결단 덕분에 나는 제사문화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되어 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어머니께서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우직하게 지키시려고 했던 일화가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친할머니가 당시 부모님과 함께 거주하셨던

곤지암 자택에서 임종하셨는데 장례를 집에서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