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진 집사의 고백(1)"
내가 태어난 곳은 언덕을 하나만 넘어가면
시와 군으로 갈리는 아주 촌구석이었다.
또 옆 마을은 도보로 20, 30분씩
걸어가야만 나오는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들에 나가 일을 도와야 했던 나에게는 일요일이 없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덕 위에 녹색 천막이 지어지고
나무 두 개로 더하기 표시를 만들고
묶어 세워놓은 곳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화의 혜택이라고는 전무한,
구멍가게조차 없던 마을에서
처음으로 본 이상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하기 싫다는 마음에 무턱대고
천막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녹색 천 위에 붙여 놓은 나무조각 옆,
책꽂이에 꽂혀 있던 작은 책,
보라색 천에 쌓여 있는 자그마한 밥그릇,
검은색 한복을 입고 부잣집 마나님처럼
머리를 한 아줌마.
내 눈에 비친 교회의 첫인상은
너무나 낯선 모습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시고
본인이 전도사라고 말씀하시던 분.
너무 오래되어서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은커녕
하나님이나 십자가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던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나를 통하여 전도 아닌 전도를 하게 하셨다.
성인 한 명 없는 교회에
나를 포함하여 아이들 5명이 전부였지만
부활절에는 계란에 그림을 그려 나누고,
성탄절 전야에는 새벽송을 돌았다.
세례를 받기 위하여 열심히 암송했던
십계명과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
30년 가까이 교회의 문턱에도 가지 않았음에도
매일 고백한 것처럼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분의
사랑과 헌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나의 십 대 시절은 수많은 이사와
어머니의 기나긴 투병 생활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
12살부터 어머니의 자리를 메꿔야 했고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중3 시절, 한 달간 학교를 갈 수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학교를 포기하고
동생들을 키우라’는
어머니의 유언은
16살의 내가 버티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고통과 시련이었다.
나는 점점 망가지고 있는데
엄마는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혼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며
나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원망이 생기게 되었고,
그로 인한 반동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새어머니는 기독교인을
일명 ‘예수쟁이’라 부르는 분이셨다.
그러니 나의 믿음 생활이 어떻게 보였을까?
새어머니 입에서
"남자 만나러 간다."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후
다시는 교회를 찾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하나님은 원망의 대상이자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나의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나의 하루하루는 힘들었고,
점점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안수진 집사의 고백(1)"
내가 태어난 곳은 언덕을 하나만 넘어가면
시와 군으로 갈리는 아주 촌구석이었다.
또 옆 마을은 도보로 20, 30분씩
걸어가야만 나오는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들에 나가 일을 도와야 했던 나에게는 일요일이 없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덕 위에 녹색 천막이 지어지고
나무 두 개로 더하기 표시를 만들고
묶어 세워놓은 곳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화의 혜택이라고는 전무한,
구멍가게조차 없던 마을에서
처음으로 본 이상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하기 싫다는 마음에 무턱대고
천막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녹색 천 위에 붙여 놓은 나무조각 옆,
책꽂이에 꽂혀 있던 작은 책,
보라색 천에 쌓여 있는 자그마한 밥그릇,
검은색 한복을 입고 부잣집 마나님처럼
머리를 한 아줌마.
내 눈에 비친 교회의 첫인상은
너무나 낯선 모습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시고
본인이 전도사라고 말씀하시던 분.
너무 오래되어서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은커녕
하나님이나 십자가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던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나를 통하여 전도 아닌 전도를 하게 하셨다.
성인 한 명 없는 교회에
나를 포함하여 아이들 5명이 전부였지만
부활절에는 계란에 그림을 그려 나누고,
성탄절 전야에는 새벽송을 돌았다.
세례를 받기 위하여 열심히 암송했던
십계명과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
30년 가까이 교회의 문턱에도 가지 않았음에도
매일 고백한 것처럼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분의
사랑과 헌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나의 십 대 시절은 수많은 이사와
어머니의 기나긴 투병 생활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
12살부터 어머니의 자리를 메꿔야 했고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중3 시절, 한 달간 학교를 갈 수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학교를 포기하고
동생들을 키우라’는
어머니의 유언은
16살의 내가 버티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고통과 시련이었다.
나는 점점 망가지고 있는데
엄마는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혼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며
나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원망이 생기게 되었고,
그로 인한 반동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새어머니는 기독교인을
일명 ‘예수쟁이’라 부르는 분이셨다.
그러니 나의 믿음 생활이 어떻게 보였을까?
새어머니 입에서
"남자 만나러 간다."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후
다시는 교회를 찾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하나님은 원망의 대상이자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나의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나의 하루하루는 힘들었고,
점점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