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집사의 고백"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우리 가정에 너무도 큰 충격과 아픔이 찾아왔다.
20년 넘게 나를 아들로 대해주신 장모님의 루게릭이라는 희귀 병명.
가족 모두가 큰 충격에 빠져 서로에게
어떠한 위로조차도 할 수 없는 힘든 하루하루가 흘렀다.
본인의 병을 아시면서도 병원비부터 걱정하시는 장모님을 보며
우리 부부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를 가슴으로 낳았다고 아들처럼 대해주신 특별한 장모님이셨기에
더욱 이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말씀 묵상과 가족들의 합심 기도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하나님,
그런 와중에 병은 더 악화되어 몸이 굳어갔고
재활치료를 위해 루게릭병으로 유명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도 자유롭지 않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재활치료가 꼭 필요하다는 나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시간이 흘러 몇 달 후, 아내가 면회를 다녀왔다.
장모님이 집에 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말, 의사소통은 거의 되지 않는다는 말들로
나의 가슴에 대못이 박혀 버렸다.
재활치료만이 근육이 살아날 길이라는 어리석은 판단,
예수님 없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었기에
가족 모두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컸다.
빨리 집으로 모시기 위해 의사와 상담 중 청천벽력 같은 말,
“지금 집으로 가시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드물게 좋아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론은 모 아니면 도. 위험부담은 보호자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어찌하는 게 옳은 걸까요?’
지금까지는 내 생각에 의존한 결정이 컸지만 중요한 순간,
간절히 아버지께 울부짖었다.
여전히 명확한 응답은 없으셨지만
위험 부담이 있어도 집에 오셔서 주일은 온라인 예배로 드리고
교회와 가까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이라는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집에 오신 첫날 밤 10시경에 최고의 위기가 찾아왔다.
입술이 파랗게 변해가고 호흡이 되지 않는 상황,
급하게 119를 불렀지만 시간은 더디게 느껴지고
우리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만 흘렸다.
장모님 숨은 약해지고 얼굴 전체가 창백해지신 그때,
내 입에서 방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언을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성령님의 은혜로 점점 숨이 돌아오고
구급대가 도착하여 간단한 조치 후 안정을 찾으셨다.
이 사건으로 정말 예수님이 장모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꼈고
이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장모님의 간병에 아낌없이 최선을 다하였다.
집에 오실 때 꼬리뼈가 보일 만큼 손바닥 크기의 욕창은
현재 거의 새살이 돋아 방문 간호사마저 놀랄 정도로 완치되었고
신장 기능도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빈혈이 심하셔서 주기적으로 수혈을 받으셨는데 빈혈 수치 또한 안정적이다.
집에 오신 후 1년여가 지난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기도한다.
우리들의 의와 욕심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에서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며 작은 힘이나마
다시 봉사와 헌신하실 수 있기를 매일 밤 기도한다.
나는 전적으로 믿는다.
반드시 일어나셔서 겪으셨던 모든 일들을 열방에 간증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실 것을….
삶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일 하심을 경험하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로 안수해 주시는 황규식 담임목사님,
어떤 표현으로도 감사함을 다할 순 없지만 정말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시고 중보기도 해주시는
산성 가족분들에게도 무한감사를 표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24시간 장모님을 돌보는 큰 처형,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평안에 젖어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김진혁 집사의 고백"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우리 가정에 너무도 큰 충격과 아픔이 찾아왔다.
20년 넘게 나를 아들로 대해주신 장모님의 루게릭이라는 희귀 병명.
가족 모두가 큰 충격에 빠져 서로에게
어떠한 위로조차도 할 수 없는 힘든 하루하루가 흘렀다.
본인의 병을 아시면서도 병원비부터 걱정하시는 장모님을 보며
우리 부부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를 가슴으로 낳았다고 아들처럼 대해주신 특별한 장모님이셨기에
더욱 이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말씀 묵상과 가족들의 합심 기도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하나님,
그런 와중에 병은 더 악화되어 몸이 굳어갔고
재활치료를 위해 루게릭병으로 유명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도 자유롭지 않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재활치료가 꼭 필요하다는 나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시간이 흘러 몇 달 후, 아내가 면회를 다녀왔다.
장모님이 집에 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말, 의사소통은 거의 되지 않는다는 말들로
나의 가슴에 대못이 박혀 버렸다.
재활치료만이 근육이 살아날 길이라는 어리석은 판단,
예수님 없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었기에
가족 모두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컸다.
빨리 집으로 모시기 위해 의사와 상담 중 청천벽력 같은 말,
“지금 집으로 가시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드물게 좋아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론은 모 아니면 도. 위험부담은 보호자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어찌하는 게 옳은 걸까요?’
지금까지는 내 생각에 의존한 결정이 컸지만 중요한 순간,
간절히 아버지께 울부짖었다.
여전히 명확한 응답은 없으셨지만
위험 부담이 있어도 집에 오셔서 주일은 온라인 예배로 드리고
교회와 가까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이라는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집에 오신 첫날 밤 10시경에 최고의 위기가 찾아왔다.
입술이 파랗게 변해가고 호흡이 되지 않는 상황,
급하게 119를 불렀지만 시간은 더디게 느껴지고
우리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만 흘렸다.
장모님 숨은 약해지고 얼굴 전체가 창백해지신 그때,
내 입에서 방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언을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성령님의 은혜로 점점 숨이 돌아오고
구급대가 도착하여 간단한 조치 후 안정을 찾으셨다.
이 사건으로 정말 예수님이 장모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꼈고
이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장모님의 간병에 아낌없이 최선을 다하였다.
집에 오실 때 꼬리뼈가 보일 만큼 손바닥 크기의 욕창은
현재 거의 새살이 돋아 방문 간호사마저 놀랄 정도로 완치되었고
신장 기능도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빈혈이 심하셔서 주기적으로 수혈을 받으셨는데 빈혈 수치 또한 안정적이다.
집에 오신 후 1년여가 지난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은 기도한다.
우리들의 의와 욕심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에서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며 작은 힘이나마
다시 봉사와 헌신하실 수 있기를 매일 밤 기도한다.
나는 전적으로 믿는다.
반드시 일어나셔서 겪으셨던 모든 일들을 열방에 간증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실 것을….
삶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일 하심을 경험하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로 안수해 주시는 황규식 담임목사님,
어떤 표현으로도 감사함을 다할 순 없지만 정말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시고 중보기도 해주시는
산성 가족분들에게도 무한감사를 표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24시간 장모님을 돌보는 큰 처형,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평안에 젖어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께 영광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