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애 권사의 고백"
우리 고향은 아주아주 시골 우리나라 땅끝이다.
나는 어릴 적, 외할머니가 무당이라서 늘 우상숭배하는 걸 보고 자랐다.
새벽이면 항아리에 물을 붓고 바가지를 엎어서, 두드리며 염불 외우는 할머니 모습,
신당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난다.
난 이런 할머니 집이 너무너무 싫어서, 심부를 시켜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동네 제사가 있으면 맨 처음 제사음식을 외할머니 집 마루 위에 차려다 놓으셨는데
그걸 제단 위에 옮겨 물동이 박을 두들기며
그 집에 복을 빌었던 외할머니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갔다.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 성령님 따로인 신앙이었지만
그냥 교회가 좋고 참 열심히 다녔다.
지금도 내 신앙생활에 찬송과 기도를 떠올리면
어릴 적, 동네에서는 아무도 안 다녀도 나 혼자 토요일 학생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다녔던 그때가 생각난다.
우리 동네에서 교회를 가려면 윗동네 점등까지 산길을 따라 3km 정도 가야 하는데
산중 턱엔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가 있다.
우리 교회 명권사님 댁인데 명권사님은 밤마다 마루에 불을 켜놓고 교회로 출근을 하신다.
철야 하시며 늘 방언으로 기도하시던 권사님. 자녀분들이 도시에서 성공하여
모시고 가려 하여도 산등선 불도 켜야 하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고집하신다고 전도사님은 늘 말씀하셨다.
난 어린 마음에 "나 같으면 자식을 따라 편하게 도시에 가서 살겠구먼."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나, 불신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분당으로 이사를 오고,
옆집 사시는 권사님 권유로 분당 효자촌까지 교회를 다녔다.
옆집 권사님이 일산으로 이사를 가시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전도사님을 만나 산성교회에 나오라며 전도를 하셔서
그 주 수요일에 등록하고 금요일 철야예배 때, 어릴 적 산등선 명권사님이
교회 바닥에 앉아 늘 하시던 방언을 드디어 나도 말하게 되었다.
방언이 터져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가 않아 목사님께서 여러 번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난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성경대학을 들으며 귀신의 존재, 하나님의 경륜 등등. 기라성같은 말씀을 들으며,
난 심장이 뜨거워지고 나 같은 걸 택하여 구원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시어머님을 전도하게 되고 어머님께서는 성령체험 후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셨다.
나에게 어머님께서는 "난 너희에게 줄 것이 없으니 무얼하면 너희가 잘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대뜸 "기도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어머님과 난, 기도훈련을 시작했다. 차츰차츰 기도시간을 늘려
하루 18시간을 기도하시기 시작하셨고, 죽전으로 이사를 오면서,
통나무교회 유아실에서 기거하시면서 기도를 하시다가
지금 성전을 건축하시면서는 목사님께서 5층 한나방을 만들어
어머님 기도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다 2010년 어머님께 주신 말씀이 딤후4:7-8의 말씀을 받으셨고,
2011년 1월 하나님께로 가셨다. 난 참 많이 어머님이 그립고 보고 싶고 힘들 때
"그래. 그때 내 곁에서 늘 기도해주셨지..."이런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점등, 산모퉁이 외딴지 호롱불을 밝혀놓고, 교회 지킴이로 사셨던 권사님처럼.
늦게 예수님을 믿었지만, 한 번도 의심없이 순전한 믿음으로 기도하시다가
아버지 품으로 가신 시어머님처럼,
나도 늘 중보로 기도하며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목사님, 사모님. 늘 한결같이 곁에 있어준 정전도사님,
신실하고 믿음 좋은 산성식구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딤후4:7-8 말씀이 이 땅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이기를 소망하며....
"박수애 권사의 고백"
우리 고향은 아주아주 시골 우리나라 땅끝이다.
나는 어릴 적, 외할머니가 무당이라서 늘 우상숭배하는 걸 보고 자랐다.
새벽이면 항아리에 물을 붓고 바가지를 엎어서, 두드리며 염불 외우는 할머니 모습,
신당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난다.
난 이런 할머니 집이 너무너무 싫어서, 심부를 시켜도 가고 싶지가 않았다.
동네 제사가 있으면 맨 처음 제사음식을 외할머니 집 마루 위에 차려다 놓으셨는데
그걸 제단 위에 옮겨 물동이 박을 두들기며
그 집에 복을 빌었던 외할머니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갔다.
하나님 따로, 예수님 따로, 성령님 따로인 신앙이었지만
그냥 교회가 좋고 참 열심히 다녔다.
지금도 내 신앙생활에 찬송과 기도를 떠올리면
어릴 적, 동네에서는 아무도 안 다녀도 나 혼자 토요일 학생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다녔던 그때가 생각난다.
우리 동네에서 교회를 가려면 윗동네 점등까지 산길을 따라 3km 정도 가야 하는데
산중 턱엔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가 있다.
우리 교회 명권사님 댁인데 명권사님은 밤마다 마루에 불을 켜놓고 교회로 출근을 하신다.
철야 하시며 늘 방언으로 기도하시던 권사님. 자녀분들이 도시에서 성공하여
모시고 가려 하여도 산등선 불도 켜야 하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고집하신다고 전도사님은 늘 말씀하셨다.
난 어린 마음에 "나 같으면 자식을 따라 편하게 도시에 가서 살겠구먼."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나, 불신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 분당으로 이사를 오고,
옆집 사시는 권사님 권유로 분당 효자촌까지 교회를 다녔다.
옆집 권사님이 일산으로 이사를 가시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전도사님을 만나 산성교회에 나오라며 전도를 하셔서
그 주 수요일에 등록하고 금요일 철야예배 때, 어릴 적 산등선 명권사님이
교회 바닥에 앉아 늘 하시던 방언을 드디어 나도 말하게 되었다.
방언이 터져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가 않아 목사님께서 여러 번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난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성경대학을 들으며 귀신의 존재, 하나님의 경륜 등등. 기라성같은 말씀을 들으며,
난 심장이 뜨거워지고 나 같은 걸 택하여 구원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시어머님을 전도하게 되고 어머님께서는 성령체험 후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셨다.
나에게 어머님께서는 "난 너희에게 줄 것이 없으니 무얼하면 너희가 잘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대뜸 "기도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어머님과 난, 기도훈련을 시작했다. 차츰차츰 기도시간을 늘려
하루 18시간을 기도하시기 시작하셨고, 죽전으로 이사를 오면서,
통나무교회 유아실에서 기거하시면서 기도를 하시다가
지금 성전을 건축하시면서는 목사님께서 5층 한나방을 만들어
어머님 기도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다 2010년 어머님께 주신 말씀이 딤후4:7-8의 말씀을 받으셨고,
2011년 1월 하나님께로 가셨다. 난 참 많이 어머님이 그립고 보고 싶고 힘들 때
"그래. 그때 내 곁에서 늘 기도해주셨지..."이런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점등, 산모퉁이 외딴지 호롱불을 밝혀놓고, 교회 지킴이로 사셨던 권사님처럼.
늦게 예수님을 믿었지만, 한 번도 의심없이 순전한 믿음으로 기도하시다가
아버지 품으로 가신 시어머님처럼,
나도 늘 중보로 기도하며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목사님, 사모님. 늘 한결같이 곁에 있어준 정전도사님,
신실하고 믿음 좋은 산성식구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딤후4:7-8 말씀이 이 땅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이기를 소망하며....